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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저자 에밀 아자르 역자 용경식 나는 헌 책을 파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책장에서 빨간책방에 나온 책이 없는지 살핀다. 얼마 전 낙성대동의 흙 책방에서도 그랬다. 분명 빨간책방 에피소드 제목에서 본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과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발견하고 바로 구매했다. 책 상태는 아주 좋았다. 언젠가 이 책들을 모두 읽고 빨간책방에서 해당하는 에피소드를 다시 들을 거다. 「자기 앞의 생」은 9월인가 10월에 갔던 윤현상재 라이브러리의 헌 책방에서 샀다. 오해할 수도 있지만 윤현상재 라이브러리는 책 파는 곳이 아니라 인테리어 관련 머티리얼(수도꼭지부터 타일, 손잡이 등 당신이 인테리어와 관련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전시해 둔 곳이다. 그곳에서 헌 책방을..

Bookshelf 2023.11.06

일요일 허연

일요일 허연 별로 존경하지도 않던 어르신네가 "인생은 결국 쓸쓸한 거"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지금도 연애 때문에 운다 오베르 가는 길 여우 한 마리 죽어 있다 여우 등에 내리쬐는 그 빛에 고개 숙인다 길 건너 저녁거리와 목숨을 맞바꾼 여우 보리밭 옆 우물가 사람들은 여기서도 줄을 서 있다 마음이 뻐근하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 한다 은희경 「태연한 인생」에서 마지막 행이 인용된 걸 읽고 찾아보았던 시. 취업 준비하면서 생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쓸쓸함과 고독함에 관해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었던 시기여서, 인용된 시구가 묵직하게 읽혔던 기억이 난다. 「태연한 인생」에서는 소설 속 엄마의 상황에 쓰인다.

Poems 2023.10.04

허준이

“저는 자극적인 것에 약한 사람이에요. 잘 중독되죠. 그래서 일상을 깨뜨릴 수 있는 자극은 거의 피합니다.” “집중력이 약한 제가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이 모래시계로 잴 수 있는 15분” “깊은 생각이 필요할 때는 모래시계를 한 번 뒤집어서 집중했다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뒤집는 과정을 반복하며 연구한다” 점심시간엔 혼자 슬그머니 연구실을 나와 식당으로 향한다. 어제도, 그제도, 일주일 전에도, 지난달에도 갔던 똑같은 식당, 똑같은 메뉴다. 한 중동 음식 전문점의 ‘샤와르마’(케밥처럼 구운 고기를 빵에 싸 먹는 중동 요리)다. 허 교수는 “새로운 음식을 고르고 맛보면 정신이 산만해지는데, 일종의 불필요한 자극이어서 일상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구에 방해받지 않는 데 초점을..

Quotes 2023.06.09

2023.06.07.

요즘 일과 진로에 관해 아주 골똘히 생각한다.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게 된 계기는 무언가에 반하면서부터다. 너무 많은 것에 쉽게 반한다.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어 대학에서 광고를 전공했는데 그 일이 더 이상 내 일이 아니라고 일찌감치 포기했다. 군에 가기 전엔 보건학을 전공하고 싶어 했고, 전역 후에는 그로스 마케터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 런업이라는 유튜브를 보고 홀딱 반해 다짜고짜 메일을 보냈는데 덜컥 일하게 됐다. 거기서 3개월 일하면서 그 일이 그새 질려버렸다. 핑계를 대려면 얼마든 댈 수 있었다. 자꾸 흔들리는 내가 싫었다. 작년말 UX 라이터라는 직업에 반해 열심히 구직했고 지금 UX 라이터로 일하고 있다. 그때쯤 모티비를 보고 모빌스 팀에서 일하고 싶어 기획자에 지원했는데 떨어졌다. 그땐 기획자..

Journal 2023.06.07

프릳츠에서 일합니다

모티비에서 프릳츠커피컴퍼니 김병기 대표 이야기를 듣고 이 브랜드가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디자이너 조인혁 씨도 병기님 같은 대표를 본 적 없다고 말하는데 정말 어떤 사람이고 어떤 회사일까... 궁금하더군요. 이 책도 읽었고, 프릳츠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잘되어가시나'도 시간역순으로 좀 읽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제 미래를 스스로 생각할 때 기술자의 삶은 철저하게 배제했는데요. 김병기 대표와 프릳츠커피컴퍼니를 알아갈수록 기술자로서의 제 삶을 계속 상상해보게 됩니다. 제 머릿속 회색 지대가 '정진하는 삶'이라는 영역으로 새롭게 탈바꿈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Bookshelf 2023.06.06

살아가다 일하다 만들다

저자 미나가와 아키라 역자 김지영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 미나가와 아키라 편을 읽고 아, 이 책은 정말 사지 않을 수 없겠구나 싶어 샀습니다. 이번 연휴 동안 읽고 있습니다. 달리기 선수가 되려다 부상으로 고꾸라진 미나가와 씨의 삶이 패션 디자이너로 이어진 게 참 신기합니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원단을 버리지 않으려는 건 어시장에서 알바할 때 배웠던 게 이어졌지 않나 싶습니다.'라던가, '달리기를 하며 배운 게 이렇게 이렇게 이어져...' 등의 생각이 가능한 것이지, 막상 미나 페르호넨이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그가 견딘 삶의 진폭은 아주 힘겨운 것이지 않았을까요. 전 그쪽이 더 궁금한 편인데 이런 회고록에선 보통 그런 게 잘 드러나지 않아서요.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쉽습니다. 책을 읽다가 ..

Bookshelf 2023.06.06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감독 기타노 다케시 주연 마키 쿠로우도, 오시마 히로코 기쿠지로의 여름 감독으로 유명한 기타노 다케시의 1991년 作입니다. 에무시네마 별빛영화제 상영으로 보고 왔습니다. Silent Love라고 하는 메인 테마곡이 변주되어 몇 번 나오는데 그때마다 참 귀여운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운드트랙을 담당한 사람은 히사이시 조로,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Summer를 작곡한 인연 이전에 이 영화가 있었군요. 마키 쿠로우도는 최근에도 배우 활동을 잇는 중이고, 오시마 히로코는 이 작품 외 출연작이 없습니다. 별안간 정말 사랑스러운 영화였습니다.

Videoclub 2023.06.06

말없는 소녀

감독 콤 베어리드 주연 캐서린 클린치 지난 일요일 영화 말없는 소녀 GV에 다녀왔습니다. 비 오는 날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2백여 명 남짓한 관객 분들과 둘러앉아 영화 보고, 평론가 이동진 씨, 소설가 김중혁 씨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저는 빨간책방을 너무 좋아해서 세 번 이상 돌려 들었고, 그래서 두 분의 대화가 흘러가는 리듬이나 농담의 배치가 익숙한 편인데요. 관객 분들도 '웃어라!' 하는 타이밍에 빵빵 터지시는 걸 보니 빨책 좀 들었다 하시는 분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가 더 안락했습니다. 2022년 제작된 아일랜드 영화인데 독특한 점이 아일랜드라는 지역의 로컬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겁니다. 로컬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말은 감독이 영화가 갖는 배타성을 감수했다는 건데요. 촬영도 아일랜드,..

Videoclub 2023.05.31

어머니

내 어머니는 1967년 4월 29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다섯 남매의 둘째 딸로, 국민학교가 끝나면 주로 방에서 그리고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옥천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5월에 자동차 부품 제조사의 경리로 들어가 일하다가, 스물 네 살이 되던 해 중매로 아버지와 혼인하고 울산에 내려왔다. 그 뒤로 어머니는 주부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매일같이 바닥을 쓸고, 그릇을 닦고, 빨래를 널고, 지금까지 만 번에 가까운 식사를 지어 가족에게 대접했다. 문학이 좋아 국어교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지금은 눈이 침침해 책 읽는 게 버거운 사람. 생활의 둘레가 ‘가정’이라는 단어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자식을 보살피는 동안 주부로, 또 한동안은 산후조리 도우미로 내 집 남의 집을 번갈아 다녔지만 결국 집 밖..

Origin 2023.05.31

아버지

내 아버지는 1963년 11월 18일 울산에서 태어났다. 네 남매의 장남으로, 국민학교가 끝나면 뱃일을 했던 내 친조부와 시장에 나갔던 친조모를 도우며 자랐고 울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해 스무살이 되던 해 거제의 정유공장에 들어가 처음 일을 시작한다. 거뭇거뭇한 얼굴에 까만 기름때를 뒤집어쓴 채.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를 견뎌가며. 받은 돈의 대부분을 울산에 있는 부모와 동생들에게 부치며. 이후 여러 공장을 전전하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 들어가 가정을 꾸렸고, 올해로 37년째 기술노동자로 근속 중이다. 마찬가지로 거뭇한 얼굴에 주름살을 끼얹은 채. 페인트 냄새를 견뎌가며. 받은 돈의 대부분을 가정에 부치며. 인생의 대부분을 생계유지에 바친 사람. 일하지 않은 날이 일한 날에 비해 턱없이 적은 사람. 지금의 ..

Origin 2023.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