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29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주연 오미카 히토시, 니시카와 료 나도 어렸을 때 암묵적인 합의를 어기고 마을의 시야에서 벗어난 적이 있다. 왜 그랬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노란 플라스틱 굴다리와 선선한 공기, 5시 무렵의 하늘 같은 게 떠오른다. 나는 그때 아파트 북쪽 언덕 위의 하얀 교회에 딸린 놀이터에 있었다. 그날 부모님과 이웃들은 나를 찾아 나섰고 나는 위층 아주머니께 발견되었다. 난 어릴 적 기억을 대부분 잃었지만 어머니께 전해 들은 이야기다. 나는 혼나지도 않았고 매를 맞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 하나 찾아 뭇 어른들이 시간을 내서 땀흘린다는 게 거대한 말썽 같지만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거 같다. 나는 당연하듯 분실되었고 마을은 당연하듯 나를 찾아 나섰다. 머지않아 ..

Videoclub 2024.03.29

안부 기계 이수명

안부 기계 이수명 네가 안부를 묻는다. 안부는 여기 없다. 저기 이웃에 있다. 안부는 들판에 놓여 있다. 안부가 들판에 쓰러진다. 나는 걸음을 옮기지 못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저녁이면 걸음을 옮겼고 사람들이 다 같이 옮기는 걸음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지 않고 걸어갔고 그들은 그냥 걸음과 하나가 되어서 걸음 자체여서 나는 그만 걸음을 멈추었는데 네가 안부를 묻는다. 안부는 나를 아프게 하고 안부는 나의 살갗을 파고들고 살갗은 너무 캄캄해 나는 캄캄한 살갗을 여기저기에 걸어둔다. 들판 여기저기에 천천히 굳어가는 돌이 있어 돌을 입에 넣는다. 네가 안부를 묻는다. 이수명, 『물류창고』, 2018

Poems 2024.03.12

강릉의 소리와 단어

2024-03-01부터 2024-03-02까지 강문해변에서 마루 무너지는 소리와 포말 터지는 소리, 바람 소리를 들었다. 칠사당에서 기와지붕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햇빛에 녹아, 기왓장을 타고 흙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묵었던 숙소의 툇마루에서 아침 새 지저귀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 강릉에서 방문한 킨조 스튜디오에서 옥색 반팔 티셔츠와 무화과 사진 엽서를 샀다. 티셔츠에는 강릉의 일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다리가 다 나으면 이걸 입고 서울을 달릴 거다. 조카가 태어난지 100일이 되어 편지를 써주려던 참에 마침 무화과 엽서가 보여서 샀다. 조카 편지에 외삼촌 말고 외삼춘이라 쓰는 게 재밌다. 강릉도 강능이라 써봤다. 다른 뜻은 없고 강릉 영어 표기가 Gangneung인 게 재밌어서... ..

Essays 2024.03.12

2023 했던 생각

나는 나를 무엇으로 정의하는가? 기본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어떤 추상과 관념을 머릿속에 갖고 있고, 주기적으로 그것을 교체한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패턴을 메타 인지하거나 겉으로 드러내는 걸 아직 본 적이 없어서... 나는 나를 사유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2023년 한 해도 내가 했던 생각 중 결론지은 것과 여전히 풀지 못한 것이 있다. 그러면서 내게 중요해진 것도 있다. 그 생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생각했다. 2023년 내가 결론지은 생각들 - 한 명의 인간 개체는 무척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타인에 대한 판단을 가능한 유보하기로 했다. 내게 나쁜 짓을 했다고 나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다. 공중도덕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고 그이를..

Journal 2024.01.14

드라이브 마이 카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주연 니시지마 히데토시, 미우라 토코 2023년 12월 21일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동석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GV에 다녀왔다. 개봉했을 때 이미 보았던 영화다. 두 번째로 보고 나서야 알았다. 좋은 영화구나. 줄거리와 구성이 희미하게나마 각인된 상태여서 영화를 더 자유롭게 볼 수 있었다고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크레딧이 올라오고 불빛이 켜지자 마자 적은 메모가 이렇게 남아 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발짝 나아가는 것만이 개인이 진보하는 유일한 방법.' GV 당시 이동진 평론가의 질문에 동시통역사가 읊었던 감독의 진술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GV에 참석하지 못 했던 분들, 이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 보기를 바라며 그 내용을 올려본다. 이동진: '드라이브 마이 ..

Videoclub 2024.01.03

이마 허은실

이마 ​허은실 ​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 보았다 ​ 이마의 크기가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가난한 나의 이마가 부끄러워 뺨 대신 이마를 가리고 웃곤 했는데 ​ 세밑의 흰 밤이었다 어둡게 앓다가 문득 일어나 벙어리처럼 울었다 ​ 내가 오른팔을 이마에 얹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자세 때문이었다 빨간책방 300회 특집에서 영화평론가 이동진 님이 소개한 빨책 작가 허은실 시인님의 시.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수록.

Poems 2023.11.17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보통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에 기획부터 제작까지 3년을 쓴다고 하는데, 이 영화는 7년에 걸쳐 제작한 작품이다. 은퇴를 번복하고 제작한 작품이자, 감독의 나이(82세)를 고려했을 때 유작을 만든다는 태도로 임했을 작품. 일생에 걸쳐 애니메이터로 작품을 만들어 온 한 명의 사람이, 마침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작품을 만든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어할까?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작품의 관람 꼭지가 여럿 나온다. 어린시절의 원체험(Origin)에 관한 이야기, 정체성(일본인)에 관한 이야기, 직업 애니메이터로서 몸담은 지브리 스튜디오에 관한 이야기, 시나리오 작가로서 쓰고 싶었을 이야기로서의 마지막 이야기. 내가 기억하는 한 내..

Videoclub 2023.11.16

자기 앞의 생

저자 에밀 아자르 역자 용경식 나는 헌 책을 파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책장에서 빨간책방에 나온 책이 없는지 살핀다. 얼마 전 낙성대동의 흙 책방에서도 그랬다. 분명 빨간책방 에피소드 제목에서 본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과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발견하고 바로 구매했다. 책 상태는 아주 좋았다. 언젠가 이 책들을 모두 읽고 빨간책방에서 해당하는 에피소드를 다시 들을 거다. 「자기 앞의 생」은 9월인가 10월에 갔던 윤현상재 라이브러리의 헌 책방에서 샀다. 오해할 수도 있지만 윤현상재 라이브러리는 책 파는 곳이 아니라 인테리어 관련 머티리얼(수도꼭지부터 타일, 손잡이 등 당신이 인테리어와 관련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전시해 둔 곳이다. 그곳에서 헌 책방을..

Bookshelf 2023.11.06

일요일 허연

일요일 허연 별로 존경하지도 않던 어르신네가 "인생은 결국 쓸쓸한 거"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지금도 연애 때문에 운다 오베르 가는 길 여우 한 마리 죽어 있다 여우 등에 내리쬐는 그 빛에 고개 숙인다 길 건너 저녁거리와 목숨을 맞바꾼 여우 보리밭 옆 우물가 사람들은 여기서도 줄을 서 있다 마음이 뻐근하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 한다 은희경 「태연한 인생」에서 마지막 행이 인용된 걸 읽고 찾아보았던 시. 취업 준비하면서 생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쓸쓸함과 고독함에 관해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었던 시기여서, 인용된 시구가 묵직하게 읽혔던 기억이 난다. 「태연한 인생」에서는 소설 속 엄마의 상황에 쓰인다.

Poems 2023.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