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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여행

2024-09-28 김포국제공항 어둑한 새벽에 사당역으로 공항버스를 타러 갔다. 나는 몰랐지만 공항버스는 예약제였고 그날 김포로 가는 공항버스 첫 차엔 빈 좌석이 없었다. 공항에 가기도 전부터 예기치 못한 일이 터진 것이다. 비행기를 타려면 당장 택시를 잡아야 한다. 그 생각에 캐리어를 끌고 정류장을 떠나는데 기사님이 날 붙잡았다. 예약해 놓고 오지 않은 분이 1명 있으니 저 앞에까지만 타고 가보자고. 대신 예약자가 오면 내려달란 것이다. 예약자가 오지 않아 20번 자리에 앉으면 된다는 기사님 말에 버스 뒤로 갔지만 만석이었다. 요금을 이미 내버려서, 기사님은 자신이 착각했다며 미안하지만 입석으로 가면 안되겠느냐 묻는다. 택시비는 몇 만원일 텐데 4천원을 내고 버스 복도에 앉아서 간다면 나야 좋다. 캐리..

Essays 2024.11.24

기미 김경주

기미(幾黴) ―리안에게  김경주  황혼에 대한 안목眼目은 내 눈의 무늬로 이야기하겠다 당신이 가진 사이와 당신을 가진 사이의 무늬라고 이야기하겠다  죽은 나무 속에 사는 방房과 죽은 새 속에 사는 골목 사이에 바람의 인연이 있다 내가 당신을 만나 놓친 고요라고 하겠다 거리를 저녁의 냄새로 물들이는 바람과 사람을 시간의 기면으로 물들이는 서러움. 여기서 바람은 고아孤兒라는 말을 쓰겠다  내가 버린 자전거들과 내가 잃어버린 자전거들 사이에 우리를 태운 내부가 잘 다스려지고 있다 귀가 없는 새들이 눈처럼 떨어지고 바다 속에 내리는 흰 눈들이 물빛을 버린다 그런 날 눈을 꾹 참고 사랑을 집에 데려간 적이 있다고 하겠다  구름이 붉은 위胃를 산문山門에 걸쳐놓는다 어떤 쓸쓸한 자전 위에 누워 지구와의 인연을 생각한..

Poems 2024.07.10

퍼펙트 데이즈

감독 빔 벤더스주연 야쿠쇼 코지 2024년 7월 7일 씨네큐브에서 진행된 이동진 김중혁 퍼펙트 데이즈 GV 대담 내용을 받아적은 후 일부 수정.* 영화 내용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동진 훗날 야쿠쇼 코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야쿠쇼 코지는 지난 2-30년간 일본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얼굴 중 하나다. 마지막 장면은 감독이 배우를 믿지 못하면 저렇게 찍을 수 없다. 정면을 응시하는 롱테이크가 연출적으로 기발하진 않지만 배우가 그 대본을 온몸으로 받아낸 게 아닌가. 위대한 배우다. 이 장면을 보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티모시 샬라메가 모닥불을 바라보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티모시가 모닥불을 바라보는 장면이 배우의 엄청난 연기력으로 성립된 것이라면, 야쿠쇼 ..

Videoclub 2024.07.08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주연 오미카 히토시, 니시카와 료 나도 어렸을 때 암묵적인 합의를 어기고 마을의 시야에서 벗어난 적이 있다. 왜 그랬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노란 플라스틱 굴다리와 선선한 공기, 5시 무렵의 하늘 같은 게 떠오른다. 나는 그때 아파트 북쪽 언덕 위의 하얀 교회에 딸린 놀이터에 있었다. 그날 부모님과 이웃들은 나를 찾아 나섰고 나는 위층 아주머니께 발견되었다. 난 어릴 적 기억을 대부분 잃었지만 어머니께 전해 들은 이야기다. 나는 혼나지도 않았고 매를 맞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 하나 찾아 뭇 어른들이 시간을 내서 땀흘린다는 게 거대한 말썽 같지만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거 같다. 나는 당연하듯 분실되었고 마을은 당연하듯 나를 찾아 나섰다. 머지않아 ..

Videoclub 2024.03.29

안부 기계 이수명

안부 기계 이수명 네가 안부를 묻는다. 안부는 여기 없다. 저기 이웃에 있다. 안부는 들판에 놓여 있다. 안부가 들판에 쓰러진다. 나는 걸음을 옮기지 못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저녁이면 걸음을 옮겼고 사람들이 다 같이 옮기는 걸음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지 않고 걸어갔고 그들은 그냥 걸음과 하나가 되어서 걸음 자체여서 나는 그만 걸음을 멈추었는데 네가 안부를 묻는다. 안부는 나를 아프게 하고 안부는 나의 살갗을 파고들고 살갗은 너무 캄캄해 나는 캄캄한 살갗을 여기저기에 걸어둔다. 들판 여기저기에 천천히 굳어가는 돌이 있어 돌을 입에 넣는다. 네가 안부를 묻는다. 이수명, 『물류창고』, 2018

Poems 2024.03.12

강릉의 소리와 단어

2024-03-01부터 2024-03-02까지 강문해변에서 마루 무너지는 소리와 포말 터지는 소리, 바람 소리를 들었다. 칠사당에서 기와지붕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햇빛에 녹아, 기왓장을 타고 흙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묵었던 숙소의 툇마루에서 아침 새 지저귀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 강릉에서 방문한 킨조 스튜디오에서 옥색 반팔 티셔츠와 무화과 사진 엽서를 샀다. 티셔츠에는 강릉의 일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다리가 다 나으면 이걸 입고 서울을 달릴 거다. 조카가 태어난지 100일이 되어 편지를 써주려던 참에 마침 무화과 엽서가 보여서 샀다. 조카 편지에 외삼촌 말고 외삼춘이라 쓰는 게 재밌다. 강릉도 강능이라 써봤다. 다른 뜻은 없고 강릉 영어 표기가 Gangneung인 게 재밌어서... ..

Essays 2024.03.12

2023 했던 생각

나는 나를 무엇으로 정의하는가? 기본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어떤 추상과 관념을 머릿속에 갖고 있고, 주기적으로 그것을 교체한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패턴을 메타 인지하거나 겉으로 드러내는 걸 아직 본 적이 없어서... 나는 나를 사유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2023년 한 해도 내가 했던 생각 중 결론지은 것과 여전히 풀지 못한 것이 있다. 그러면서 내게 중요해진 것도 있다. 그 생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생각했다. 2023년 내가 결론지은 생각들 - 한 명의 인간 개체는 무척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타인에 대한 판단을 가능한 유보하기로 했다. 내게 나쁜 짓을 했다고 나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다. 공중도덕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고 그이를..

Journal 2024.01.14

드라이브 마이 카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주연 니시지마 히데토시, 미우라 토코 2023년 12월 21일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동석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GV에 다녀왔다. 개봉했을 때 이미 보았던 영화다. 두 번째로 보고 나서야 알았다. 좋은 영화구나. 줄거리와 구성이 희미하게나마 각인된 상태여서 영화를 더 자유롭게 볼 수 있었다고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크레딧이 올라오고 불빛이 켜지자 마자 적은 메모가 이렇게 남아 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발짝 나아가는 것만이 개인이 진보하는 유일한 방법.' GV 당시 이동진 평론가의 질문에 동시통역사가 읊었던 감독의 진술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GV에 참석하지 못 했던 분들, 이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 보기를 바라며 그 내용을 올려본다. 이동진: '드라이브 마이 ..

Videoclub 2024.01.03

이마 허은실

이마 ​허은실 ​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 보았다 ​ 이마의 크기가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가난한 나의 이마가 부끄러워 뺨 대신 이마를 가리고 웃곤 했는데 ​ 세밑의 흰 밤이었다 어둡게 앓다가 문득 일어나 벙어리처럼 울었다 ​ 내가 오른팔을 이마에 얹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자세 때문이었다 빨간책방 300회 특집에서 영화평론가 이동진 님이 소개한 빨책 작가 허은실 시인님의 시.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수록.

Poems 2023.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