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s 4

기미 김경주

기미(幾黴) ―리안에게  김경주  황혼에 대한 안목眼目은 내 눈의 무늬로 이야기하겠다 당신이 가진 사이와 당신을 가진 사이의 무늬라고 이야기하겠다  죽은 나무 속에 사는 방房과 죽은 새 속에 사는 골목 사이에 바람의 인연이 있다 내가 당신을 만나 놓친 고요라고 하겠다 거리를 저녁의 냄새로 물들이는 바람과 사람을 시간의 기면으로 물들이는 서러움. 여기서 바람은 고아孤兒라는 말을 쓰겠다  내가 버린 자전거들과 내가 잃어버린 자전거들 사이에 우리를 태운 내부가 잘 다스려지고 있다 귀가 없는 새들이 눈처럼 떨어지고 바다 속에 내리는 흰 눈들이 물빛을 버린다 그런 날 눈을 꾹 참고 사랑을 집에 데려간 적이 있다고 하겠다  구름이 붉은 위胃를 산문山門에 걸쳐놓는다 어떤 쓸쓸한 자전 위에 누워 지구와의 인연을 생각한..

Poems 2024.07.10

안부 기계 이수명

안부 기계 이수명 네가 안부를 묻는다. 안부는 여기 없다. 저기 이웃에 있다. 안부는 들판에 놓여 있다. 안부가 들판에 쓰러진다. 나는 걸음을 옮기지 못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저녁이면 걸음을 옮겼고 사람들이 다 같이 옮기는 걸음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지 않고 걸어갔고 그들은 그냥 걸음과 하나가 되어서 걸음 자체여서 나는 그만 걸음을 멈추었는데 네가 안부를 묻는다. 안부는 나를 아프게 하고 안부는 나의 살갗을 파고들고 살갗은 너무 캄캄해 나는 캄캄한 살갗을 여기저기에 걸어둔다. 들판 여기저기에 천천히 굳어가는 돌이 있어 돌을 입에 넣는다. 네가 안부를 묻는다. 이수명, 『물류창고』, 2018

Poems 2024.03.12

이마 허은실

이마 ​허은실 ​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 보았다 ​ 이마의 크기가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가난한 나의 이마가 부끄러워 뺨 대신 이마를 가리고 웃곤 했는데 ​ 세밑의 흰 밤이었다 어둡게 앓다가 문득 일어나 벙어리처럼 울었다 ​ 내가 오른팔을 이마에 얹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자세 때문이었다 빨간책방 300회 특집에서 영화평론가 이동진 님이 소개한 빨책 작가 허은실 시인님의 시.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수록.

Poems 2023.11.17

일요일 허연

일요일 허연 별로 존경하지도 않던 어르신네가 "인생은 결국 쓸쓸한 거"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지금도 연애 때문에 운다 오베르 가는 길 여우 한 마리 죽어 있다 여우 등에 내리쬐는 그 빛에 고개 숙인다 길 건너 저녁거리와 목숨을 맞바꾼 여우 보리밭 옆 우물가 사람들은 여기서도 줄을 서 있다 마음이 뻐근하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 한다 은희경 「태연한 인생」에서 마지막 행이 인용된 걸 읽고 찾아보았던 시. 취업 준비하면서 생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쓸쓸함과 고독함에 관해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었던 시기여서, 인용된 시구가 묵직하게 읽혔던 기억이 난다. 「태연한 인생」에서는 소설 속 엄마의 상황에 쓰인다.

Poems 2023.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