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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풍석 뮤지엄

myeongwoolee 2023. 5. 23. 21:31

석 뮤지엄 내부와 외부

 

한라산 남서쪽 굽이진 숲길 속 디아넥스 호텔 주차장에 희고 깨끗한 관광버스 한 대가 서 있다. 제주에선 매일, 하루에 세 번씩, 그 버스로 스무 명 정도의 사람이 모인다. 이타미 준의 이름을 알음알음 짚어 찾아온 이들이다.

버스는 아주 정확한 시각에 출발하고, 버스 안에선 명랑한 목소리의 가이드가 준비된 멘트를 까랑까랑 내어 보인다. 수풍석 뮤지엄의 유지 및 보수, 관람객을 통제하는 모든 일은 뮤지엄이 자리한 비오토피아의 주민자치단체가 관장하고 있다고 한다. 버스 운전수는 아주 느린 속도로 우리를 석 뮤지엄, 풍 뮤지엄, 슈 뮤지엄으로 데려다 놓는다. 과속방지턱에선 차를 거의 멈추다시피 하고, 버스에서 내릴 때마다 조심해서 내리라고 일러 준다.

수풍석 뮤지엄은 건축가 이타미 준이 제주의 물, 바람, 그리고 돌을 각각의 건축물로 현상한 일종의 설치 예술이다. 석 뮤지엄, 풍 뮤지엄, 수 뮤지엄은 모두 이타미 준이 애정했던 제주 산방산을 향해 있다.

 

풍 뮤지엄 내부와 외부

 

각 뮤지엄에 내리면 가이드가 커다란 휴대폰 화면으로 사진을 보여주며 갖은 설명을 해 준다. 설명이 끝나면 관람객은 자유롭게 사진을 찍는다.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며 봐야 하는 작품이라는 게 신기했는데, 나는 당시에 통제된 관람 환경과 이를 군말 없이 따르는 초면의 사람들의 질서가 더 신기했다. 전시장에서 사진을 삼가는 본인만의 엄격한 기준을 가진 예술품 애호가도, 그곳을 몇 번이나 방문할 만한 여유가 확보된 부자도 아니었다. 모두 나처럼 제주에서의 시간을 쪼개서 멀리까지 찾아온 관광객이었다.

석 뮤지엄은 직육면체 철판 구조물의 안팎으로 비오토피아에 있던 돌을 그대로 옮겨 배치하고, 원기둥 모양의 작은 굴뚝을 내 공전 주기에 따라 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햇빛이 건축물 내부를 비추도록 설계한 작품이다. 그 빛은 하루에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 정도 뮤지엄 바닥에 놓인 작은 돌판 위에 얹힌다.

풍 뮤지엄은 판넬 모양으로 자른 일본산 적송을 철 구조물로 이어 붙여 작은 집 모양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너비가 한 뼘 정도 되는 나무판자 사이에는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이격이 일정하게 주어져 있는데, 그 빈틈으로 계절에 따라 큰 방과 작은 방에 햇빛이 격자무늬로 든다. 내가 갔을 땐 작은 방에 햇빛이 들고 있었다. 풍 뮤지엄의 한쪽 벽면은 곡면으로 되어 있는데, 이타미 준이 나무 사이로 이동하는 바람의 소리를 살리기 위해 의도했다고 한다.

 

수 뮤지엄 내부와 외부


수 뮤지엄은 벽을 사각형으로 치고, 그 위에 뻥 뚫린 도넛 모양의 지붕을 얹은 작품이다. 뮤지엄의 바닥 한 가운데에는 마찬가지로 사각형인 작은 인공 연못이 있다. 뚫린 지붕으로 해가 들고, 수면에는 뮤지엄 내부가 비친다. 물은 이곳의 바닥이 되고, 하늘이 이곳의 천장이 된다. 수면 위에 앉은 햇빛은 이 완벽하게 설계된 작은 사랑방의 마지막 내빈이다. 공간에 압도되는 경험은 어째서인지 종교적인 면이 있다. 수 뮤지엄의 한쪽 면에 앉아 반대쪽에 놓인 물과 돌과 벽과 처마와 하늘을 보고 있으면 지금 이 순간을 점지한 신이 존재할 것만 같다. 한 사진작가는 내가 봤던 바로 그 장면, 물 위로 돌, 벽, 지붕, 하늘이 차례로 쌓인 그 장면에 구름 한 점이 하늘의 여백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때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삼일을 기다렸다고 한다.

재일한국인 유동룡은 본인의 성 무송 유(庾) 자가 일본에 없어 건축가로 활동한 시기의 대부분을 이타미 준이라는 일본식 예명으로 지냈다. 한국에선 그를 일본 이름에 갇혀 평생 고국을 그리워 한 사람, 그래서 제주에 애착을 갖고 건축물을 남긴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그를 로컬리즘의 표상으로 생각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한다. 수풍석 뮤지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년 11월 유동룡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양쪽에선 서로를 언급하지 않아 비오토피아 주민회와 유동룡 기념관이 어떤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지 짐작할 방법은 없다. 다만 한국은 이제야 건축가 유동룡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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