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그레이엄닷컴을 자주 보며 완전히 매료되었다. 창 크기에 아무 반응 않는 콘텐츠 크기, 그래서 너무 작은 버튼, 20년 전 css 교재에 나올 듯한 디자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개발자 중 한 명인 사람의 블로그가 그런 모습인 게 멋있다. 도메인도 그냥 paulgraham.com이다. 근데 블로그에 올라온 에세이를 읽으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나도 그런 공간을 갖고 싶었다. 나만의 온라인 아지트, 디지털 안전가옥.
나는 브런치도 네이버 블로그도 갖고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담을 만큼 애정이 가는 공간은 아니다. 디자인과 링크 주소에 플랫폼 냄새가 배어 있는 것도 싫다. 그래서 이명우닷컴을 만들자고 지난주쯤에 메모장 구석탱이에 적어 두었다.
처음엔 윅스 같은 툴로 내 블로그를 만들면 될 줄 알았는데 그건 비용도 시간도 많이 드는 일이었다. 외주를 맡기자니 비용도 비용이지만 내가 원하는 느낌을 나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남에게 맡기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 지 뻔히 보였기에... 아는 형에게 물어 내가 구현하고자 하는 블로그를 가장 쉽고 빠르게 만들 방법을 찾았다.
처음 만져 보는 티스토리와 어제 오늘 몇 시간 씨름해서 마침내 내 블로그를 만들었다. 카테고리는 내가 채울 수 있는 것들로만 우선 구성했다. Essays엔 내가 직접 쓴 에세이를, Bookshelf엔 내가 산 책을(산다고 다 읽진 않으니), Videoclub엔 내가 본 영화를, Quotes엔 내가 메모한 누군가의 글과 말을 올릴 거다.
홈에는 사진 한 장 달랑 걸었다. 시드니 천문대 언덕을 이틀에 한 번 꼴로 다녔을 때 직접 찍은 사진이다. 푸터엔 SNS 링크 하나 없이 아이클라우드 메일 주소만 적어 놓고 다른 건 html에서 지웠다. 가비아에서 도메인을 사서 연동시켰다. myeongwoolee.com만 남게.
나는 이 공간이 너무 개방적이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 내가 궁금해서 찾아온 사람과, 나를 전혀 모르지만 우연히 이 비밀의 장소를 찾아온 사람만이 볼 수 있도록. 그런 사람들이 내 블로그를 보고 방명록을 남겨 준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릴 것 같아 방명록은 열어 두었다. 댓글은 모두 닫았다.
얼마 전 애인에게 어떤 얘기할 때 내 눈이 반짝거리느냐 물었더니 멋진 사람들 얘기할 때라고 답해 주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라 신기하고 뾰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 그런 사람을 만나 날 소개해야 할 때 이명우닷컴을 보여 주고 싶다. 그런 공간으로 가꾸고 싶다. 남을 위해 만든 거 말고 내가 좋아서 만든 것들로 채우고 싶다.
오늘은 북저널리즘에서 원의 독백 임승원씨의 인터뷰를 읽고 원의 독백 영상을 계속 봤는데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리고 내 눈이 얼마나 반짝거리던지… 나도 임승원 씨처럼 내가 만들 수 있는 것 중 가장 멋지고 가치 있는 걸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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