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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myeongwoolee 2023. 11. 6. 23:18

 저자 에밀 아자르

 역자 용경식

 

 나는 헌 책을 파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책장에서 빨간책방에 나온 책이 없는지 살핀다. 얼마 전 낙성대동의 흙 책방에서도 그랬다. 분명 빨간책방 에피소드 제목에서 본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과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발견하고 바로 구매했다. 책 상태는 아주 좋았다. 언젠가 이 책들을 모두 읽고 빨간책방에서 해당하는 에피소드를 다시 들을 거다.

 

 「자기 앞의 생」은 9월인가 10월에 갔던 윤현상재 라이브러리의 헌 책방에서 샀다. 오해할 수도 있지만 윤현상재 라이브러리는 책 파는 곳이 아니라 인테리어 관련 머티리얼(수도꼭지부터 타일, 손잡이 등 당신이 인테리어와 관련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전시해 둔 곳이다. 그곳에서 헌 책방을 잠깐 열었었는데 마침 운 좋게 그곳에 갔고, 상태가 정말 좋은 헌 책들을 정말 싼 가격에(권당 일천 원) 샀다. 그때도 빨간책방에 나온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조르조 바사니의 금테 안경을 함께 샀다.

 

 이 책은 보름 쯤 전에 모두 읽었고 빨간책방 에피소드도 달리기하며 1·2부를 모두 들었다. 책이 가볍고 작아 퇴근길 버스에서 읽기 좋았다. 몇 년 전에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을 때처럼 '과연 대단한 책이구나, 정말 그렇구나.'라며 감탄을 연발하며 읽었다. 그러나 책의 관점이나 발상 자체는 조너선 사프런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 더 가깝다.

 

 책의 원제는 프랑스어로 La Vie devant soi(레 비 데봉 수아)로 여생이라는 뜻이다. 출판사가 자기 앞의 생이라고 조금 바꾸었다.

 저자인 에밀 아자르의 본명은 로맹 가리로, 문단과 비평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가명으로 활동한 그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를 밝힌 로맹 가리 본인의 수필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 문학동네 판본에 부록으로 딸려 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작가의 문장력이다. 유머가 적절하게 스민 비판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발췌했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

 이튿날 아침 카츠 선생님이 정기검진을 왔다. 진찰을 마친 선생님을 따라 층계참으로 나왔을 때, 이번에는 정말 올 것이 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병원으로 옮겨야겠다. 더이상 여기에 놔둘 수가 없어. 구급차를 불러야겠구나."

 "병원에 가면 어떻게 해줄 건데요?"

 "적절한 치료를 해줄 게다. 그러면 얼마간 더 살 수 있어. 어쩌면 꽤 오래 살 수도 있고. 이런 경우에 몇 년씩이나 더 살게 된 사람들도 보았단다."

 제기랄!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츠 선생님 앞에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어보았다.

 "저기요, 아줌마를 안락사시켜주실 수는 없나요, 같은 유태인끼린데?"

 그는 정말로 놀라는 기색이었다.

 "뭐라고? 안락사라고?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안락사 말예요, 안락사를 시켜달라구요. 아줌마가 더이상 고통받지 않게 말예요."

 카츠 선생님은 너무 놀란 나머지 계단에 주저앉으려 했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연달아 몇 번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안 돼 모모야, 그럴 순 없어. 안락사는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단다. 우리는 문명국가에 살고 있어. 넌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거야."

 "알고 있어요. 나는 알제리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곳에는 신성한 민족자결권이 있다던데요."

 그는 마치 내가 자기를 위협하기라도 한 것처럼 두려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는지 … 짜증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신성한 민족자결권이란 게 있어요, 없어요?"

 "물론 있지."

 그는 나를 내려다보기 위해 앉아 있던 계단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물론 있단다. 그것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이지. 하지만 그게 지금 로자 부인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건요, 만약 그런 권리가 있다면 로자 아줌마에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마음대로 할 신성한 자결권이 있다는 거죠. 아줌마가 자결하고 싶다면 그건 아줌마의 권리라구요. 그리고 아줌마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선생님이 도와주어야 해요. 유태인 배척주의에 걸리지 않으려면 유태인 의사가 필요하니까요. 유태인끼리 서로 괴롭히면 안 돼요. 그건 정말 구역질난다구요."

 카츠 선생님은 점점 더 한숨을 몰아쉬고 이마에는 땀방울까지 맺혔다. 그 정도로 내가 말을 잘했던 것이다. 내가 네 살 더 먹은 구실을 제대로 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 아가야, 넌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난 선생님의 아이가 아니에요. 나는 아이가 아니라구요. 나는 창녀의 아들이고, 내 아버지는 내 엄마를 죽였어요. 그런 걸 알면, 모르는 게 없는 것이고, 더이상 아이가 아니잖아요."

 그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얼빠진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누가 그런 말을 했니, 모모야? 그런 얘기를 누가 너한테 했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선생님. 아버지는 없는 게 더 나을 때가 많으니까요. 내가 존경하는 하밀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그것은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면 아니까요. 그리고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 씨의 친구분이잖아요.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선생님. 발작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난 정신병자가 아니에요. 그건 유전병도 아니래요. 창녀 엄마를 죽일 일도 없을 거예요. 이미 죽었으니까요.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엄마의 엉덩이는 이제 하느님이 차지하고 있겠죠. 이제 모두 다 지겨워요. 로자 아줌마만 빼고요. 아줌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의사들을 즐겁게 해 주자고 아줌마를 식물처럼 살게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불쌍한 사람들 얘기를 쓸 때는 누굴 죽이지 않고도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다 쓸 거예요. 그건 누굴 죽이는 것과 같은 힘이 있대요. 선생님이 인정머리 없는 늙은 유태인이 아니고 심장이 제자리에 붙어 있는 진짜 유태인이라면, 좋은 일 한번 해주세요.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런 생에서 구해주세요. 생이란 것은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버렸어요. 그놈의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 아버지란 작자 때문이에요. 그 작자는 어찌나 잘 숨어 있는지 낯짝도 안 보여요. 그 낯짝을 재현시키는 것조차도 안 된대요. 붙잡히지 않으려고 마피아들을 풀어서 막잖아요. …로자 아줌마를 도와주지 않는 더럽고 멍청한 의사들은 비난받아야 해요. 그것은 범죄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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