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는 1967년 4월 29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다섯 남매의 둘째 딸로, 국민학교가 끝나면 주로 방에서 그리고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옥천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5월에 자동차 부품 제조사의 경리로 들어가 일하다가, 스물 네 살이 되던 해 중매로 아버지와 혼인하고 울산에 내려왔다. 그 뒤로 어머니는 주부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매일같이 바닥을 쓸고, 그릇을 닦고, 빨래를 널고, 지금까지 만 번에 가까운 식사를 지어 가족에게 대접했다.
문학이 좋아 국어교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지금은 눈이 침침해 책 읽는 게 버거운 사람. 생활의 둘레가 ‘가정’이라는 단어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자식을 보살피는 동안 주부로, 또 한동안은 산후조리 도우미로 내 집 남의 집을 번갈아 다녔지만 결국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사람. 아이 셋을 낳고 기르느라 몸을 다 버린 사람. 욕망하는 것들을 스스로 끊어내고 셀 수 없는 고독을 견뎌온 사람. 몸에서 열이 화끈화끈 날 때까지 짓궃은 일들을 견뎌 온 마음 약한 사람. 익살스러운 배금주의자. 딸들의 가장 좋은 말벗. 배를 가르고 나온 나를 보며 웃는 사람. 내가 가장 가여워하는 사람. 엄마도 이제 엄마 인생을 살아야지, 라는 말을 항상 입에 머금지만 절대로 꺼낼 수 없다. 엄마는 자신의 인생을 사는 법을 알까? 자녀가 모두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되면 어쨌든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숙명처럼. 거역할 수 없는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런 미래의 잔인함을 엄마는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내가 다 알고 있었노라고 언젠가 말해주고 싶다.
2022.3.9. 씀